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동학 농민 혁명 (문단 편집) === 2차 봉기 === 상황이 안정되자 조선 조정은 청군과 일본군에게 이제 됐으니 철군하라고 요구했으나, [[갑신정변]] 이후 다시 조선에 영향력을 뻗칠 기회만 노리던 일본은 이렇게 '''천재일우의 기회'''[* [[이토 히로부미]]의 말이다. 이토 히로부미가 이런 말을 할 만했던 게, 당시 일본제국 의회에서 내각 불신임 상주안을 가결시켜버려 당시 총리였던 이토는 물론이고 내각까지 벼랑 끝으로 내몰렸던 시기였다. 그러니까 하늘이 [[일본 제국]]에게 준 기회라는 뜻도 있고 그것이 역사적으로 중요하지만, 따지자면 '''자기에게''' 준 기회라는 뜻이 강하다(...)]를 놓칠 생각 따윈 없었다. 일본은 조선의 철군 요구에 "우리가 알아본 결과 동학난이 진압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."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철군 요구를 무시하고 조선 주둔을 천명했다. 청군은 의외로 얌전하게 철군을 준비했으나[* 사실 당시 청 내부에서 조선을 전통적 조공속국 개념을 넘어 근대적 의미의 식민지로 만들자는 의견이 없었던 건 아니었으나, 주류가 아니었다. 당장 청 조정의 수장인 [[이홍장]]부터 조선 식민지화는 되도 않은 소리라고 반대했다. 지금처럼 속국 관계나 유지시키자는 게 당시 청의 주류 의견이었으니, 무리하게 조약을 어기거나 할 이유가 없었던 셈. 게다가 청은 조선과 나쁜 감정도 없었고 조선이 오랫동안 청을 상국으로 잘 섬겨온 판국에 굳이 식민지로 삼을 필요가 없었다. 무엇보다 당시 청나라는 도저히 다른 나라와의 전쟁을, 하다못해 조선과의 전쟁조차 감당할 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, 별 이유도 없이 조선을 무리하게 집어삼키려다가 조선이 청을 상대로 저항하거나 일본에 붙어버리면 낭패였다. 특히 한반도의 지형은 중국에서 위로 급히 꺾이는 지형이기 때문에, 황무지나 다름없는 만주를 완전히 장악 및 개척하지 않고서는 조선을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다. 이때문에 한반도 완전 병탄은 중국사를 통틀어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. [[몽골]]조차도 고려를 속국/부마국으로 만드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을 지경. 당시 만국의 병신(...)(정말로 병 걸린 자, 그러니까 병신이라고 불렀다.) 소리를 듣던 청 입장에서는 도저히 무리였다.], 일본군은 철군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고 러시아와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중재도 단칼에 씹어버렸다. 청의 [[이홍장]]이 공동 철수를 제안했으나 이 역시 단호하게 거부했고, 오히려 일본은 청에게 공동으로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하자는 제안을 한다. 이에 청은 "동학의 난은 이미 다 끝난 상태이고 조선의 개혁은 조선 사람들의 몫이지 우리들이 이래라 저래라할 권리는 없다."고 일본의 요구를 거부했다.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청에 대한 일본군의 도발이 시작된다. 일본군은 무력으로 [[일본군의 경복궁 점령|경복궁을 점령]]하고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 선언을 강요했다. 또한 고종의 이름을 빌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은 모두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, 이러한 사정들로 인해 [[청일전쟁]]이 발발한다. 전쟁 와중에 [[김홍집]] 내각은 군국 기무처를 설치, 1차 [[갑오개혁]]을 진행했으며, 전장이 일본에게 유리하게 흘러가 내정 간섭의 단계에 들어가자 동학군은 이에 분노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취지로 2차 동학 농민 봉기를 일으킨다.[* 역시 이에 대해서도 대원군의 사주가 있었다는 주장이 있다. 구한 말 정변에는 모두 대원군 개입설이 있으며 상당히 유력하다. 다만 이 시기에는 일본의 경복궁 침공이 있었으므로 고종이 억류된 상황이었는데, '''대원군이 고종의 밀서를 위조'''해서 전봉준에게 봉기를 지시했다는 이야기도 존재한다. 동학의 2차 봉기가 고종과 연결되어 있는지, 대원군과 연결되어 있느냐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미가 있... 을 수도 있었다. 뭐 결국 실패하면서 크게 영향력이 없어져 버렸지만. 한편 일본군 참모 가와키미 소로쿠와 히라오카 쇼타로가 '청국을 토벌한다'는 묵계 아래 [[우치다 료헤이]] 등 14명의 낭인들이 천후협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. 이들은 조선으로 가 전봉준을 만나 거사를 촉구하고 무기를 지원하였으며, 홍계훈이 농민군에 보낸 사자를 죽이기까지 했다. 물론 동학군이 승리했다는 둥, 지명이나 인원이 훨씬 적고 쌩뚱맞다는 점에서 신빙성 있는 기록은 아니다, 동학 측 기록인 《천도교 창건사》에도 "일본인 다케다 한지(武田範之) 등 15명이 금시계 1개와 [[마노]](瑪瑙: [[보석]]의 일종) 하나를 보내어 믿음을 보이고 면회를 청한 즉 전봉준이 거리낌 없이 이들을 면담하고 시국을 서로 논하였다"라는 말이 있다. 하지만 2차 봉기 이후, 대원군 등에 의해 성격이 청과 (전략적으로) 손잡고 일본과 싸운다는 것으로 바뀌면서 FAIL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